블랙 코미디 또는 잔혹 동화『광륜』/ 명대사 명장면 골라보기
인생이 만만치 않은 것처럼 이 소설 또한 만만치 않다.
블랙 코미디 또는 잔혹 동화로서 <광륜>
본문에 이런 글들이 찌릿하게 다가와 발췌...
파옥초의 『광륜』 [명대사 명장면]――――――――――――――――――――――――――――――――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왔었던 적이 있었지. 그들은 아주 조금씩 우리 세 식구의 영혼을 뜯어먹었어. 아주 조금씩 말이야.”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동철의 얼굴을 보았다.
“돈이 필요했어. 그것도 아주 절실히 말이야.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이었지. 무일푼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문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 환승 통로 모퉁이에서 주저앉아 버렸어.”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무심한 발소리만이 들렸다.
“너무나 편했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바닥에 주저 앉아버리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무심한 발소리만이 들렸다.
“너무나 편했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바닥에 주저 앉아버리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
마리아는 잠시 현실의 공포를 잊고 동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숙자마냥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어.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어. 가끔 힐끔거리는 시선을 던지고는 자기 갈 길들을 가기에 바빴지. 그때,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 모두들 어디를 가는 거지. 각자의 사람들이 향하는 그곳은 행복하고도 안락한 곳일까. 나만 남겨두고 모두들 어디로 가는 거지. 왜 나는 여기 남겨진 것일까. 너무나 외로웠어. 답답했어.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어. 시장에서 야채를 싸게 샀다며 기뻐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어. 그리고 이어서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지.”
동철은 살짝 목이 메었다.
“해어져서 솜뭉치가 삐져나온 곰 인형을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딸아이의 얼굴이. 이대로 편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어. 나도 일어서서 걷지 않으면, 지금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어. 못난 남편, 못난 아빠이지만 그들 곁으로 돌아가 지켜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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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으로 오기 전날 밤, 아내와 딸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최후의 만찬 같은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는 빚을 갚기 위해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기에, 세 식구가 모여서 즐기는 마지막 사치였다. 대화는 없었다.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여 음식을 입으로 나르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제법 말을 잘 하기 시작한 세 살 딸아이가 숟가락과 포크를 쥔 고사리 같은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동철을 바라보았다.
힘내라. 힘내라. 우리 아빠. 힘. 내. 라. 우리 엄마. 힘. 내. 라.
일 년 전까지 다녔던 유치원에서 배운 응원가를 흉내 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이런 자리에선 그러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지만 끝내 눈물을 머금고 말았었다.
동철은 잔디밭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나무에 기대었다. 하늘을 보니 잔뜩 몰려온 먹구름이 밤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와 뒤섞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동철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
미진이 벌떡 일어나 태희를 잡아 일으켰다.
“도망가자.”
태희가 주춤거렸다.
“전 그냥 여기 있을게요. 언니나 도망치세요. 이럴 경우…… 가만히 있는 것이 살아날 확률이 높다고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요.”
★
놈들은 마치 사내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차가운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인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마누라와 자식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어머니가 불쌍했다. 어머니 생각이 나자 울컥 눈물이 고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그 개새끼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왜 엄마는 먼저 가셨어요.”
“개가 낳은 새끼도 개일 수밖에 없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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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절을 버티어가며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라 그리 믿었다.
싱그러운 여름날에 들떠 있던 12살 소녀의 여름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
야차들의 밤이 시작된다.
숲과 호수와 산들이 외치고 있었다.
숲과 호수와 산들이 입을 모아 외치고 있었다.
야차들의 밤이 시작된다.
★
식사를 하기에는 굉장히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술에 취해서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 손님이 있었다. 자상한 아빠와 다정한 엄마 그리고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세 살짜리 어린 딸아이. 세 명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저 너머의 아득한 기억이 아주 조금 떠올랐다. 아빠와 함께 했던 마지막 식사. 그저 느낌으로만 남아 있던 기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그 모습이었다. 아빠와 엄마와 세 살짜리 영희가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희는 식탁 옆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식당 안 그 누구도 영희의 존재를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세 살짜리 영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힘내라. 힘내라. 우리 아빠. 힘. 내. 라. 우리 엄마. 힘. 내. 라.
일 년 전까지 다녔던 어린이 집에서 배운 응원가를 흉내 내고 있는 듯했다. 12살인 지금의 영희도 3살적 영희를 따라 같이 불렀다.
힘내라. 힘내라. 우리 아빠. 힘. 내. 라. 우리 엄마. 힘. 내. 라.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 놓아 울어버렸다.
모두가 떠난 텅 빈 식당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어서인지 직원들은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영희는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문득 식탁 위에 무언가가 보였다. 세 살짜리 영희가 먹다가 버린 아이스 바의 막대기였다. 식 후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바를 삼분의 이 정도 먹다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두고 가버린 것이었다. 이빨 자국 모양으로 잘려나간 아이스크림 사이로 글씨가 보였다. 영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어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을 부셔서 털어내었다. 오렌지맛 살점이 떨어져 나간 막대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한 개 더.
눈물이 멈췄다. 이렇게 끝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참조